2024. 8. 20. 19:25ㆍ카테고리 없음
⚠️주의! 『쇼콜라』, 『파르페』, 『이 푸른 하늘에 약속을』, 그리고 『화이트 앨범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카나코와 미도리, 카즈사와 세츠나.
두 여자, 한 남자. 마루토 후미아키의 시그니처 스토리텔링.
화이트 앨범2에서 느껴지는 쇼콜라의 향수.
자칭 마루토 후미아키의 팬이라고 하면서도, 쇼콜라, 파르페, 이 푸른 하늘에 약속을 세 작품만 붙잡고 있느라 정작 마루토 후미아키의 최전성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화이트 앨범2를 이제야 플레이했다는 점에선 조금 부끄럽습니다. (3년만 일찍 플레이했으면 좋았을 텐데, 정작 그때는 쇼콜라에 빠져서 번역 작업이며, 발굴 작업을 하던 때라...)
하지만 화이트 앨범2를 플레이하기 전에 마루네코 시리즈를 오래 플레이했던 경험은 화이트 앨범2를 보다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시나리오 라이터를 공유하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비록 제작사도 제작진도 다른 작품이지만) 이전 작품들의 연출과 대사를 오마주 하는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었던 점은 너무나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쇼콜라의 주요 플롯인, (화자인 주인공 대신) "두 여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점에서 마치 쇼콜라의 리부트 작품을 플레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쇼콜라는 당시의 제약 속에서도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선보였지만, 화이트 앨범2는 그로부터 수년간의 시간이 흐르며 발전한 미디어 파워를 바탕으로 훨씬 훌륭한 이야기를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 주의! 스포일러 경고를 못 보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뒤로가기.
토우마 카즈사(冬馬 かずさ), 아키시마 카나코(秋島 香奈子).
닮았지만 근본적으론 다른 두 사람. 하지만 여기에 "한 사람"이 더해진다면...
마루토 후미아키의 시나리오 라이팅 특성상, 이전 작품의 히로인들의 속성을 조금씩 비틀어서 다음 작품에 녹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독특한 연속성을 가지며, 서로 다른 작품 속에서도 각 히로인들에게서 이전작품들의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IC 챕터에서 토우마 카즈사는 아키시마 카나코의 학원 시절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쇼콜라에서 카나코는 학업 성적은 학원 역사상 최고 수재의 영역에 있지만, 대인 관계가 좁고 자신의 불만을 절도나 흡연, 음주 같은 비행으로 표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즈사 역시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은 인정받지만 지각과 결석을 밥먹듯이 하고, 세상과 담을 쌓은 외톨이면서도 때로는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는, 재능 있는 불량학생 코드를 카나코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삐뚤어진 원인은 부모님과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양측 모두 일치합니다. 카즈사는 어머니(토우마 요코)가 카즈사를 일본에 홀로 남겨두고 유럽으로 떠나버렸고, 카나코는 가정불화와 부모님들의 이혼까지 겹친 상태에서 주위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즈사는 카나코와 1:1로 대응하는, 그저 쇼콜라에서 그대로 가져온 캐릭터는 아닙니다. 그녀를 좀 더 이해하려면 쇼콜라의 오오무라 미도리의 캐릭터성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도리에 대한 이야기는 후술.
오기소 세츠나(小木曽 雪菜 ), 하야마 우미(羽山 海己).
'모두'를 부숴버린 세츠나, '모두'를 잃은 우미.
한참 쇼콜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 푸른 하늘에 약속을으로 빠지는 것에 의아하실 수도 있으나, 우미의 이야기를 빼놓고 갈 수는 없습니다. 화이트 앨범2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파멸을 불러온 선택과 치유의 과정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히로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 주제는 화이트 앨범2의 후반부인 CODA와도 연관되어 있는 주제다 보니 이 역시 후술.)
세츠나와 우미는 주위로부터 각 주인공들의 정실부인(?)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고 그럴수도 없는 입장이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항상 주인공의 곁에 머무르려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외유내강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 화려한 외모 이면에 소탈하고 가정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는 점 등등에서 코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모와 생활방식 관련 묘사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세츠나는 미스 호죠대 부속 콘테스트를 2년 연속 우승한, 자타공인 학원 최고의 미소녀이자 부잣집 아가씨로 소문이 나있지만 실상은 평범한 중산층이며 이를 숨기기 위해 수수한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알바를 한다던지, 자신의 생일에 친구들을 초대하고는 직접 요리를 해서 대접하는 제법 소탈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우미 역시 타카미즈카 학원 내에서 최고의 미소녀로 통하는 반면, 모든것이 열악한 츠구미 기숙사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매일 기숙사생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부족한 식재료를 충당하기 위해 밭일을 한다던지) 동시에 성적은 상위권인, 강인하면서도 성실한 여학생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기숙사에 바선생이 나타났을 때 가장 도움 되는 사람이 우미...)
여담으로,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사는 연출 역시 우미와 세츠나 양쪽 다 공유하고 있습니다.
오오무라 미도리, 주인공(다이스케)의 중학교 시절부터의 악우.
'중학교 시절 악우' 설정 역시 화이트 앨범2에서는 타케야와 이오로 재해석되었습니다.
미도리는 씩씩하고 남자다운 성격의,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내면에는 고독과 상처를 품고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다이스케를 좋아했지만 표현을 하지 못하다가, 중학교 졸업식 날 절친 '토우코'의 응원에 힘입어 다이스케에게 고백할 결심을 했지만 엇갈리고 맙니다.
고교 시절엔 양아치(양키)가 되어버린 다이스케를 다방면으로 챙겨줬지만, 다이스케는 항상 곁에 있어주었던 미도리 대신 카나코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 과정에서 미도리도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지만, 그녀의 "첫 번째"는 언제나 다이스케였기에 연애에 충실하지 못하고 금방 헤어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점에선 타케야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
그리고 카나코가 어머니의 이혼 때문에 센다이로 전학을 가야 하는 상황에 놓여 다이스케와 사랑의 도피를 하려 할 때, 미도리는 이 사실을 (다이스케가 미도리에게 돈을 빌리면서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담임과 다이스케의 아버지에게 알려 둘의 야반도주를 막아내지만, 카나코와 다이스케 두 사람이 결별하고 카나코는 유급을 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이로 인해 미도리는 자신이 다이스케의 곁에 남기 위해 했던 선택이 오히려 파멸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다이스케와 카나코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의 선택에 속죄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역시 세츠나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미도리(카즈사)는 줄곧 다이스케(하루키)를 좋아했다는 점과, 갑자기 나타난 카나코(세츠나)에게 좋아하는 남자를 빼앗긴다는 점에서 카즈사와의 감정선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즈사 역시 하루키와의 주요 장면에서 "줄곧… 줄곧… (좋아했었어)" (ずっと… ずっと…)라는 대사를 하는 점에서 미도리의 중요 대사를 오마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나코(세츠나)를 속이고 불륜 같은 관계로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는 비극적 전개 역시 일치합니다.
(카즈사) 「진짜 사랑은 포기할게. 그건, 세츠나 것이니까.
그래도, 거짓된 사랑만은, 나에게 줘. 일본을 떠날 때까지만... 겨울이 끝날 때까지만이면 돼.」
(미도리) 「하지만 이렇게도 말했어, 이번 달 까지 다이스케는 내 것이라고.
다이스케…, 부탁이야…. 이번 달 말까지만, 앞으로 일주일간 만큼은, 나만을 바라봐 줘!」
두 히로인은 자신의 사랑을 잊기 위해 주인공에게 기간한정 사랑을 요구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스토리 전개는 양 작품을 통틀어 손꼽히는 명장면 중 하나로, 주인공은 정해진 사랑(카나코, 세츠나)이 있음에도 그녀를 속이고 배신하면서,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가야 하는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랑(미도리, 카즈사)을 놓치기 싫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혼돈 속 가시밭길을 헤쳐나가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미도리와 카즈사 둘 다 같은 마음속 깊은 곳에 어두운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이 처한 상황의 차이는 두 사람의 운명을 좀 더 극적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미도리는 자신이 내린 선택으로 다이스케와 카나코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에 대한 속죄로 다이스케를 좋아하는 감정을 포기하고 다이스케의 곁에 머무르는 길을 걷기로 선택했지만 다이스케의 곁에 있을 수 있었기에 다이스케의 악우라는 겉모습으로 자신의 마음속 어둠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카즈사는 그와 같은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하루키와의 사랑을 포기하려 결심했고, 정말로 포기하려 했던 순간에 하루키가 나타나면서 결심을 굳히지 못하며 장장 5년의 잊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루키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카즈사가 겪은 고통은 (다이스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던 미도리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형태로 남아, 그녀의 마음속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노래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그리고 천재의 벽에 좌절한 노력파 피아니스트.
파르페에서도 사용된, "두 여자, 한 남자" 구도.
화이트 앨범2를 관통하는 소주제인 피아노는 파르페의 유이와 레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이는 연습은 대충대충 빼먹고, 노력은 하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천재적 재능을 가져 언제나 동생을 좌절케 했고, 레아는 피땀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천재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러한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결국 두 사람 모두 피아노를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러한 코드 역시 화이트 앨범2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노래하는 유이는 세츠나가 이어받았고, 피아니스트 레아는 카즈사가 이어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신 유이의 "천재 피아니스트" 기믹은 반대로 카즈사의 어머니인 요코가 이어받았습니다. (다만 카즈사의 경우엔 요코를 뛰어넘지 못하는 절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진 않고, 언젠가 요코를 뛰어넘겠다는 라이벌 의식 그 자체가 중점적으로 묘사됩니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결론적으로 카즈사는 겉모습은 카나코, 내면은 미도리, 피아니스트 설정은 레아에게서 이어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둘'이 되어서 '모두'와 행복해질 것인가, '모두'를 파괴하고 '둘'이 될 것인가.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포기하느냐,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위해 모두가 불행해져야 하는가의 딜레마.
(후술 하기로 했던 우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푸른 하늘에 약속을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와타루(주인공)의 아버지(호시노 마코토)와, 우미의 어머니(하야마 코토코)는 작중 배경이 되는 미나미사코우 섬 밖에서 결혼을 약속한 관계였으나, 마코토는 섬의 명가인 호시노 가문이라는 배경 때문에 섬 밖에서의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을 포기하기를 강요받아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각각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와타루를 낳고, 우미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코토코가 (데미즈가와 중공업의 미나미사코우 섬 사업진출을 계기로 관계자인 남편을 따라) 섬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마코토와 코토코의 운명적인 재회와는 달리, 두 사람은 과거를 묻어둔 채 친한 이웃으로 남은 듯 보였고,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소년 소녀였던 와타루와 우미는 둘도 없는 소꿉친구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작중 시점의 7년 전)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마코토와 코토코는 섬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둘'의 야반도주로 인해 '모두'의 관계는 산산히 부서져 내렸고, 이웃사촌이었던 호시노 일가와 하야마 일가는 갈라서야만 했으며, 섬의 명가인 호시노 일가의 위세 때문에 하야마 라는 성씨는 섬에서 손가락질받는 이름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소꿉친구였던 와타루와 우미 마저도 이별을 강요받아야만 했습니다.
(우미) 「'둘'이 '둘'로 있기 위해, '모두'를 부숴버린다면… 그런 '둘' 따윈, 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난… 와타루와 '둘'이서는 있을 수 없어. 와타루와 내가 '둘'이 되면, 또 '모두'가, 부서져버리니까.」
이렇게 '둘'이 되기 위해 '모두'를 부숴버린 선택의 파멸적인 결과는 이전 작품인 이 푸른 하늘에 약속을 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미 해당 작품을 플레이했던 플레이어는 화이트 앨범2에서 와타루와 우미를 괴롭게 만들었던 똑같은 선택을 직접 대면하게 됩니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거나,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모두'를 부숴버리는 선택을요.
그리고 화이트 앨범2에서의 결과 역시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카즈사 대신 세츠나를 선택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한 우미의 상상 속 세계와도 코드를 공유), 반대로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카즈사를 선택함으로써 주위 모든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마루토 후미아키의 이전 작품들에선 볼 수 없었던, '모두'를 부숴버리고 '둘'이 된다는 파멸적인 사랑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둘'과 '모두'를 양립하기 위한 갈등을 다룬 스토리텔링의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화이트 앨범2에서 볼 수 있는 쇼콜라의 오마주들.
(CG에 표현되어 있진 않지만) 한겨울에 맨발로 눈 위에 서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연출.
이 외에도 쇼콜라에서 오마주 된 묘사와 대사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카즈사) 「나는 말야, 앞으로도 피아노 말고는 아무것도 못할지도 몰라.
아니, 분명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을 거라고 생각해.」
(카나코) 「앞으로도 나는… 당신에게 짐이 될 거야. 함께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거야.
요리도, 빨래도, 청소도 평균 이하. 그런데도, 상당히 질투심 많은, 못된 여자일 거야.」
빼놓으면 섭섭한, "마루토식 다메온나" 속성을 공유하는 두 사람.
(카즈사) 「이걸로 너는…, 내 거야.」
(카나코) 「이어졌네…, 하나가 된 거구나.」
손가락에 흉터남기기. 다만 '행동'은 같지만 '의미'는 약간 다른...
아직 못다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지만...
아직 못 풀어낸, 이전 작품들을 오마주 하는 연출과 대사들, 각 히로인들의 유사성 등등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있지만, 그걸 다 여기에 썼다간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백과사전이 될 것 같아서 이만 줄이도록 하고...
마무리를 짓기 전에 한줄평과 점수를 매기고 마치려 합니다.
한줄평, 쇼콜라의 밑거름 위에 꽃을 피우다.
두 작품은 비록 다른 시간선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안에 흐르는 감정선과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쇼콜라에서 느꼈던 감동과 여운을 화이트 앨범2에서 훨씬 깊게 느낄 수 있으며, 저 역시 작중 쇼콜라를 오마주 하는 요소가 등장할 때마다 마치 쇼콜라의 리메이크, 리부트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받았습니다.
혹시 쇼콜라를 아직 플레이하지 않으셨다면, 그것도 스포일러 경고까지 무시하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화이트 앨범2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평점을 주기 전에, Leaf사의 팬들과, 화이트앨범2를 감동적으로 즐겼던 분들께는 조금 가혹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토리 및 시나리오 - 9 / 10
흐르는 눈물, 찢어지는 마음.
마루토 후미아키의 팬으로서 편파적인 채점을 하자면 당연히 만점을 줘야 마땅하겠지만, CODA에서의 미묘한 늘어짐, 급전개, 작위적 연출이 약간 점수를 깎아먹었습니다. 하지만 결말까지 쌓아가는 서사가 훌륭하기에 거의 만점. 특히 IC에서 상처받은 플레이어가 CC에서 치유받고, CODA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구조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다만 IC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다 보니 세츠나가 갖고 있는 감정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던 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제 막 1회차를 시작한 나부랭이가 너무 많은 감정의 홍수 속에서 세츠나의 감정을 정확히 캐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별도의 주석을 보기 전까지는 세츠나가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또한, 마루토 후미아키가 GIGA 마루네코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유머러스한 모습이 화이트 앨범2에서는 빈도가 낮아졌습니다.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벤트가 조금은 더 있었을 텐데, 진지함과 감동에 비중을 둔 탓인지 이전 작품들보다 약간 어두운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결론, 화이트 앨범2는 마루토 후미아키의 이전 작품들의 향수를 자극함과 동시에, 시대적인 한계 때문에 표현하기 어려웠던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감정을 더욱 세밀하게 그려낸, "마루토 후미아키식 두 여자, 한 남자" 시그니처 스토리텔링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비주얼 아트 - 6 / 10
간신히 합격점.
전체적으론 정말 훌륭한 비주얼 아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붕 문제가 너무나 거슬렸습니다. 특정하자면 손가락 묘사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인체 비율이 종종 산으로 가는 케이스도 있긴 했지만 그건 스쳐 지나가는 이벤트 CG일 뿐이라 기억에 남지도 않지만, 계속 마주해야 하는 스탠딩 CG에서 작붕이 보인다는 건 조금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물론 미소녀 그림체의 정점을 찍고 있는 2024년의 잣대로 2010년 작품을 평가하면 당연히 점수가 낮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오히려 주인장은 20년 가까이 00년대 작품만 플레이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서 온 시간 여행자(?)의 시선으로 나름 객관적인 채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몇몇 CG의 눈동자 표현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이 눈동자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언젠가 작붕을 개선한 리메이크가 나온다면 기꺼이 만점을 주겠습니다.
음악/사운드 - 7 / 10
명곡의 발목을 잡는 사운드 이펙트.
(화이트 앨범1의 유산을 포함하여) OST면에서 이 게임을 뛰어넘은 게임이 있을까요? 충분히 비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주얼 노벨 작품을 플레이해보진 못했지만, 게임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 음악과 캐릭터와 시나리오라면 셋 다 만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인게임 BGM 역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발목을 잡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효과음이 정말로 최악이었습니다.
특정하자면, 효과음의 직관성이 심하게 떨어졌습니다. 뭔가를 때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따귀를 올려붙이는 소리인지, 단순히 손을 쳐내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다거나, 감정이 폭발하는 신에서 정말로 폭발 소리가 난다거나(?), 피아노 곡조가 귀에 거슬리게 반복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몰입을 방해하곤 했습니다. 아무리 시나리오와 테마곡이 굉장하다 해도 기본적으로 화이트 앨범2는 "게임"이기 때문에 게임으로서의 경험에 있어서는 조금 미묘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스템 완성도 - 5 / 10
명작의 발목을 잡는 불쾌한 시스템.
선택지는 존재하지만 순서대로 엔딩을 보지 않으면 스토리가 꼬여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직 전말이 밝혀지면 안 되는 노말 엔딩을 보고 왔는데, 다시 시작하니 주인공의 시선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는 이벤트가 나올 때 "지금 제작사가 스포일러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차라리 엔딩이 순차적으로 열리게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정해진 레일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플레이 경험이 산으로 가버리고, 그렇다고 정해진 레일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힌트나 작중 묘사도 없으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 그렇다고 선택지가 직관성이라도 있었으면 플레이어가 어떤 루트로 가고 있는지 감이라도 잡힐 텐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다른 히로인이 공략되어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국 플레이어는 공략집 없이 빙빙 돌아야 하는 구간을 겪을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공략집을 찾아보면 '어떤 루트'가 있는지 스포일러를 당해버리는 이중고를 겪는다는 점에서 정말 불쾌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긴 게임에서 이벤트 다시 보기가 없다는 건 정말 최악입니다. 이벤트 하나하나 저장을 해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젠가 원문을 찾아보려면 원하는 지문이 나올 때까지 스킵-선택지-스킵-선택지를 반복할 생각을 하니 막막할 따름...
요약 : 2010년 게임인데 2000년에 나온 게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기본적인 기능만 덜렁 있는 구식 UI와, 직관성 떨어지는 선택지의 환장의 짝꿍.
플레이 타임 및 리플레이 - 9 / 10
정말 길다. 하지만 꽉 차있다.
1회차가 거의 20일 걸렸습니다. 하루에 최소 6시간씩 (개인시간 4시간+수면시간 2시간 희생) 플레이했는데도요. 덕분에 한 달 내내 매일매일 우울했습니다(...) 아직 플레이하지 않은 분들께는 방학이나 연휴를 끼고 플레이하라고 전해주세요.
여튼, 긴 만큼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구간도 있기에 1년 후든 2년 후든 다시 돌아와서 플레이할 때는, 조금은 익숙해진 스토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곱씹어 가면서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다회차 요소에 대해서는 조금 미묘합니다. 애초에 비주얼 노벨 게임에 다회차 요소가 있을 필요는 없지만, 게임을 전부 클리어 한 다음 IC를 다시 플레이하면 등장하는 추가 이벤트 정도는 존재. 하지만 한국인 특성상 그런 거 안 보고 지나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추가 이벤트는 아껴두었다 2회차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총점 - 8 / 10
마루토 후미아키는 너무 큰 물고기였나.
시나리오 면에선 비주얼 노벨 장르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는 것엔 이견이 없지만...
시스템면에서 제작사의 역량이 받쳐주질 못한 것이 매우 아쉬운 작품.
만약 위에서 언급된 문제점을 모두 고친, "화이트 앨범 2 리메이크"가 나온다면, 그땐 기쁘게 만점을 주겠습니다. 작붕 요소와 들쭉날쭉한 CG 퀄리티를 일신하고, 조금 더 직관적이고 조금 더 친절한 게임으로 플레이어에게 돌아온다면 정말 굉장한 작품이 되겠죠.